책 소개를 하려고 합니다.
이 책은 <홍순민의 한양읽기 : 도성> 으로,
우리나라 조선시대 도성에 대해서 역사적 시각에서 다양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제가 다니고 있는 대학에서 추천하는 도서 100선 중 하나를 선택해서 읽었으며
도성의 사진들과 함께, 역사적 관점에서 오늘날 도성의 의미에 대해서 새롭게 볼 수 있는 것이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저는 책을 읽고 독후감을 작성해
학교에서 주최하는 독서감상문 대회에서 운이좋게도 입상을해서
저에게는 더 뜻깊은 도서가 아니었나 생각이드네요.
500년 역사를 함께한 우리의 도성, 미래세대에 잘 물려주기 위해서 한번쯤 중요한 문화재의 가치로서
그 의미를 함께 생각해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래의 글은 제가 책을 읽고 작성한 독후감입니다.
감사합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그리고 도성>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역사란 어떤 의미일까. 때론, 어제의 특별한 일이 오늘의 우리에게 새로운 역사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머물러있는 것이 아닌,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존재이며 우리 삶의 과거이자 현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가. 많은 답변들이 존재하겠지만, 나는 역사를 공부하는 시간을 “지혜를 배우는 시간” 이라고 말하고 싶다. 과거로부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방향성을 설정해주는 것은, 역사만이 가지고 있는 생동감 있는 매력이다. 그러므로 선조들의 업적뿐만 아니라, 과오를 알아가는 과정조차도 역사를 알아가는 우리들에게는 그저 즐겁고 알 수 있음에 감사한 일이다. 현재의 가치와 앞으로의 미래를 볼 수 있는 지혜와 안목을 기르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에 접근해야 한다. 역사에 접근하는 방법들은 정말로 많이 있지만, 나는 ‘기록’과 ‘문화재’를 통한 접근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는 방법을 권장하고 싶다.
우리나라의 국보 1호는 왜 ‘숭례문’인 것일까. 과거에 나는 서울 한복판에서 다소 밋밋하게 위치하고 있는 숭례문이 국보라는 점이 가끔 생소하고 궁금했다. 다른 훌륭한 우리 문화재들이 많이 있을 텐데, 왜 우리는 하필이면 숭례문을 국보 1호에 지정할 만큼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인가. 그 대답을 도성의 가장 중요한 문이었던 ‘숭례문’과 그것을 구성하는 도성에 대해서 책을 토대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먼저, 숭례문을 포함하고 있는 도성의 정의에 대해서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도성은 말 그대로, ‘수도를 방어하는 성’ 의 의미를 갖는다. 한 국가에 있어서 수도는 임금이 살던 곳으로, 어느 다른 지역보다 큰 의미를 갖는 가장 중요한 지역이었다. 때문에, 수도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건축물로는 ‘종묘, 궁궐’ 그리고 수도를 방어하는 ‘도성’이 있어야만 했다. 조금 더 도성에 대해 이해를 하기 위해서 그 시대의 상황과 가치관에 대해서 알아 볼 필요가 있는데, 조선시대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던 것은 ‘임금과 왕조’였다. 그렇기 때문에, 도성의 가장 큰 목적은 ‘임금을 핵으로 형성되는 권력의 영역’을 보호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도성은 임금을 지키고, 왕권으로 대표되는 국가권력을 수호하기 위한 건조물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한양의 도성은 동서남북으로 있는 ‘내사산’의 능선을 따라서 구성되어져 있는데, 험난한 지형으로 둘러싸인 도성의 성벽들을 보면 그 당시 노동력을 제공했던 백성들의 노력이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책의 내용 중에 ‘안이토리’라는 사람에 대해서 기술한 부분이 있는데 도성을 증축하던 석수의 이름으로, 그의 신분은 평민이었다. 아마도 실력이 인정이 되어서 편수로서 도성을 쌓는 일에 큰 기여를 했지만, 광희문을 짓는 공사를 하다가 돌에 깔려죽고 만다. 이렇게 공사에 동원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일반 평민이었었다. 하지만, 도성 안에 살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일반 백성들보다는 사회 지배계급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는 측면에서 볼 때, 백성에게 있어 도성이라는 존재는 어쩌면 애증의 상징일 수도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본격적으로 도성에 대해서 알아가기 전에 우리는 도성을 볼 때 이름 없는 민초들의 노고와 수고 그리고 많은 죽음들을 먼저 기억해야만 한다.
도성은 시대와 임금의 성향 그리고, 왕권에 따라서 계속적으로 변화해 나갔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한 문화재로 ‘도성’을 바라보는 것보다도 시기에 따라 변화해온 이면에 도성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다. 태종 때에는 나라의 기틀을 닦기 위해서 견고하게 쌓았다면, 변덕스러운 성격의 숙종은 도성을 전체적으로 보수를 했고, 조선 후기 도성은 일제의 침략으로 왕권이 약해졌을 때에는 도성이 방치된 곳이 많아졌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도성의 변화 형태만으로 당시 왕의 가치관과 생각에 대해서 우리는 짐작할 수 있고, 그 당시 시대적 상황에 대해서 유추해볼 수 있다는 점은 다른 역사 기록들과는 다르게 문화재만이 줄 수 있는 역사적 지식이다.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도성에 대한 ‘왕의 의지’였다. 임진왜란이 있었을 당시, 서울로 빠르게 진격하는 왜의 위협 때문에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피난을 갔고, 병자호란 때에는 인조가 도성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갔다. 임금이 수도인 도성을 떠났다는 것은 아마도 백성들에게 마음의 상처로 다가왔을 것이다. 따라서 후에 즉위하는 왕들은 도성을 절대로 떠나지 않는다는 각오를 다졌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임금이 ‘숙종과 영조’이다.
특히, 숙종은 ‘효사물거’ 즉, 목숨을 바치더라도 따지지 않는다는 뜻의 사자성어를 표방하면서 도성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지만, 숙종의 행동과 도성에 대한 관심을 보면 과연 정말로 도성사수에 대한 결연한 의지가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점이 생긴다. 이는 ‘순성’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도성을 둘러보는 ‘순성’을 숙종은 한 번도 하지 않았고 대신, 북한산성을 몇 번 방문했었다고 기록이 되어있다. 아마도 숙종은 유사시에 북한산성으로 피난을 갈 생각이 있었는지 글쓴이는 끊임없이 의문을 가진다. 그에 반면에, 그의 아들 영조는 도성사수에 대해서 깊은 관심이 많았는데, 바로 체성에서 바깥쪽으로 튀어나가도록 쌓은 성인 ‘치성’증축을 보면 알 수 있다. 끊임없이 도성에 대한 관리체계와 삼군문 도성 수비 체제 정비를 통해서 백성의 마음을 붙잡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영조의 의지를 우리는 도성과 기록들을 통해서 우리는 알 수 있다. 이렇듯 도성의 운명과 발전은 왕들의 의지와 개개인의 성격의 차이에 따라 달라졌다. 따라서 역사를 보면, 왕의 성품과 의도를 이해할 수 있고 숨겨진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이 생긴다.
그 이후, 정조 시대에는 도성보다는 수원에 위치한 화성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였는데 기존의 군문들이 너무 많아서 백성들이 힘들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 역시 도성의 역사를 통해 함께 알 수 있는 정조의 마음이다. 그렇다면 도성의 원형은 과연 어떤 것이 옳은 것일까. 정답은 바로 모든 기간 동안에 걸친 변화의 과정이 모두 도성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인데, 조선왕조 근 600년을 걸치면서 도성은 끊임없이 바뀌어져왔다. 그렇기 때문에 매 순간순간 변화한 도성이야말로 진정한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별개로 왕권이 흔들리던 시기여서 도성의 본연의 의미와 역할을 잃기 시작한 뒤로 훼손되고 변질 된 모습은 원형보다는 ‘변형’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또한, 우리의 도성은 친근하다. 도성의 개념은 나라마다 다른데, 일본의 요새개념과 서양의 궁전의 개념이 아니라, 궁궐과 도시를 감싸고 있는 큰 담으로서의 개념으로서 우리는 도성을 받아들인다. 아마 성곽이라는 개념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북경성 역시 우리의 도성과 비슷한 원리이지만 평지에 네모반듯하고 한 면이 직선이라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우리의 한양도성은 내사산의 능선을 따라 산악지형에 자리 잡았다. 도시의 중심으로 인공적이고 심리적 압박감을 주는 위압적인 북경성과는 다르게, 우리의 도성은 크다는 느낌은 없지만, 자연의 일부처럼 조화롭게 자연지형을 이용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부드러운 인상을 준다. 즉, 도성을 보면 우리 선조들이 자연과 더불어 가는 삶을 중시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도성을 알아가는 재미를 제대로 느끼려면 ‘성돌’에 대해서 반드시 알아야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도성에 건축하는데 가장 맨 아래에 쌓은 돌은 ‘성돌’이라고 하는데 성돌을 역사적 관점에서 비교하면서 보면 보이지 않던 역사들이 보인다. 태조 시대에는 성돌로 ‘자연석’을 사용했고, 세종 시대에는 좀 더 부드럽게 다듬어진 돌을 사용했으며, 숙종때에는 조금 더 정교해져서 ‘직사각형’ 모양의 성돌을 사용했다. 그 후 증축된 것의 돌은 더욱 더 정교해진다. 태조와 태종의 견고함과는 다르게 숙종의 성돌은 약간 미숙함이 남아있는 청년의 인상을 주기도 한다는 것이 특징인데 이는 숙종의 성격과 도성에 대한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즉, ‘성돌’을 보고서 어느 시기인지 알아보는 눈이 있다면 우리는 책을 읽지 않아도 도성의 역사를 읽어갈 수 있고 왕의 성향을 파악 할 수 있다.
도성을 증축하는 것 못지않게 보수와 감독하는 것 역시 중요했고, 도성은 수도이자 왕도를 경계 짓고 보호하는 중요한 위상을 가진 만큼 국가적 차원의 과제로 중앙관서가 담당해왔다. 세종 대에서 도성을 둘러보는 순심이 정착되었으며 영조와 정조 대에 더욱 더 도성관리체계가 상세해졌다. 또한, 도성은 방어의 기능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에, 시설물과 군사적 관리를 하기 위해서 ‘순라돌기’를 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바로 조선말기이다. 순라 도는 것은 조선말기가 되어 많이 허술해졌는데, 이는 도성에 대한 군사적 관리가 허술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왕권과 국정운영의 힘이 약화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렇게 도성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역사를 훨씬 더 유연하게 접근 할 수 있다. 또한, 도성의 구역을 알려주는 ‘각자’를 성돌에 새겼었는데, 이는 숙종 때에 책임자의 이름과 수축한 날짜를 표기함으로써 ‘책임’을 부여함으로써 보다 견고한 도성이 완성 될 수 있었다.
조선의 임금은 도성 밖을 나갈 때면 항상 ‘숭례문과 흥인문’을 통해서 나갔었는데 바로 ‘숭례문과 흥인문’은 도성의 문들 가운데 가장 격이 높은 대문이자 정문이었다. 도성문은 국문이라고도 불렸었는데, 안팎을 엄하게 구별하고 나라를 공고하게 하는 시설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 중에서도 으뜸가는 문, 숭례문은 도성의 서남쪽을 드나들 때 임금이 가장 많이 사용했던 통과했던 문 이었다. 성문의 크기와 위상은 강력한 왕권과 조선의 국력을 나타내기 때문에 숭례문과 흥인문은 조선에게 중요한 존재였다.
지금까지 도성의 역사와 변화를 살펴보면, 한양의 도성은 조선에게 있어서 큰 자부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도성은 체계적으로 계획되고 실행된 조선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역사적 동반자이기도 하다. 숭례문은 그저 그 자리에서 우직하게 계속 서울과 세월을 함께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도성은 조선의 역사를 온전하게 담은 그 자체로 숭고하며, 유구한 우리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 한양도성은 우리의 과거이며 현재이다. 그래서 숭례문은 우리의 국보 1호로서의 그 가치와 의미가 충분히 있다. 또한, 과거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도성은 역사와 시기에 따라서 항상 다르게 변화해왔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인 ‘도성’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함께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누군가는 완벽한 보존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변화 없는 역사는 없고 끊임없이 발전해온 도성이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보존보다는 우리의 시대에 맞게 현대와 과거가 조화로운 융합을 통해서 우리의 소중한 도성을 지켜나가는 지혜가 모아져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얼마 전에 개봉한, '남한산성' 이라는 영화를 부모님과 함께 보고 왔던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며 글을 마치고 싶다. 현실감 넘치게 연기한 배우들의 열연도 인상적이었지만, 그것 못지않게 과하지 않게 역사적 사실들을 담담하게 담은 영화 속 우리의 아픈 역사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 해 볼 수 있는 영화라서 개인적으로 역사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더 좋았던 것 같다. 영화에서는 주연들의 심리묘사 외에도, 일반 백성들의 심리묘사를 하는 것이 일품이다. 특히, 영화 속 장면 중에서 성벽위에서, 매서운 겨울 추위와 싸우며 성곽을 지키는 병사들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항상 국가를 수호해온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도 아닌, 바로 평범한 백성들이었다. 지금까지 알아본 한양의 도성 역시 임금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성을 짓는 주체는 바로 백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임금의 업적과 결과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질 뿐, 도성을 만들기 위해 희생한 수많은 민초들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부족하다. 따라서 어떤 훌륭한 문화유산이 만들어지기까지 우리의 선조들의 땀과 노력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항상 감사할 줄 알아야 하며, 역사는 과거 특정 지점에만 머물러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훌륭한 역사와 문화유산들을 잘 보존해서 후손들에게 잘 전달해야하는 의무가 우리에게는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책임감을 가지고서 우리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유산들을 계속적으로 이어가기 위한 다양한 고민들을 함께 생각해야만 한다.
우리의 역사를 담은 도성은 그렇게 우리 곁에 함께 있어왔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시간에도 역사를 만들어가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 '도성'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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